트럼프 "한국, 관세 낮추려 1500억 달러 줬다"…실제로는 대부분 집행 전인 조선협력 약속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0월 6일(현지시간)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인근 스패로우포인트에서 연설하다 한국 이야기를 꺼냈다. 이 자리는 미국 방산기업 안두릴이 잠수함 부품을 만들 새 조선시설 '아스널-2'를 짓고 미 해군과 계약을 맺었다고 발표하는 행사였다. 청중은 대부분 해군 장병과 해군사관학교 생도였다. 연설 끝머리에 트럼프는 취임 뒤 누구도 상상 못 한 투자 약속을 받아냈다고 자랑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최근 우리에게 1500억 달러를 줬다. 전부 조선업에 들어간다. 그건 그들이 관세를 깎는 방법이었다. 그들은 관세를 깎고 싶어 했고, 나는 '그러려면 값을 치러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에는 주장이 두 개 들어 있다. 하나는 한국이 1500억 달러를 이미 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돈이 관세 인하를 사는 값이었다는 것이다. 앞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뒤의 주장은 한미 합의 문서에 근거가 있다. 문제는 두 주장이 한 문장에 묶일 때 생긴다. 아직 대부분 집행되지 않은 조건부 약속이 '관세를 산 값으로 이미 받은 돈'이 되어 버린다. 그러면 이행이 늦어질 때마다 한국이 값을 덜 치렀다고 몰아붙일 근거가 생긴다. 지난주 알래스카 LNG를 두고 바로 그런 일이 있었다.
1500억 달러는 송금액이 아니다
1500억 달러가 무엇인지부터 보자. 한미는 2025년 7월 30일 큰 틀에 합의했다. 한국은 미국에 3500억 달러를 투자하고, 미국은 한국산 상품의 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춘다는 내용이다. 11월 14일에는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과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이 투자 양해각서(MOU)에 서명했다. 3500억 달러는 성격이 다른 두 몫으로 나뉜다. 2000억 달러는 '전략적 투자'다. 한국이 달러를 조달해 미국이 만든 투자기구에 현금으로 넣는다. 사업은 미국 대통령이 고르고, 돈은 사업 진척에 따라 한 해 200억 달러까지 나눠 낸다. 나머지 1500억 달러가 트럼프가 말한 조선협력이다. 흔히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라고 부른다.
마스가는 한국 정부가 미국에 돈을 보내는 구조가 아니다. 미국 투자위원회가 승인한 조선 사업을 한국 정부가 지원하는 방식이다. 여기에는 한국 조선사의 직접투자, 정책금융기관의 대출과 보증, 선박금융이 들어간다. 2000억 달러에 적용되는 한미 간 수익 배분도 없다. 김정관 장관은 MOU 서명 당일 조선협력 수익은 모두 한국 기업 몫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1500억 달러는 미국 정부 금고로 들어가는 돈이 아니다. 한국 기업이 미국에서 벌일 조선 사업에 한국이 투자하고, 돈을 빌려주고, 보증을 서 주겠다는 약속의 크기다.
실제로 '준 돈'이 어떤 모습인지는 현금 몫에서 볼 수 있다. 한국 정부는 2000억 달러 전략투자의 첫 사업인 텍사스 엔시날 가스발전소에 10월 1일 첫 투자금 24억 달러를 송금했다. 현금으로 내기로 한 몫조차 지금까지 보낸 돈은 이 정도다.
지금까지 생긴 것은 제도와 계획이다
1500억 달러를 쓰기 위한 준비는 올해 들어 갖춰졌다. 국회가 3월 대미 전략투자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6월에는 투자 전담기관인 한미전략투자공사가 세워졌고, 7월에는 투자를 최종 결정하는 운영위원회가 출범했다. 6월 25일에는 수출입은행·산업은행 등 정책금융기관과 HD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한화오션이 이행 MOU를 맺었다. 7월 23일에는 워싱턴에 한미 조선협력센터가 문을 열었다. 그러나 이 글이 확인한 자료 어디에도 마스가로 실제 나간 대출·보증 금액이나 누적 집행액은 나오지 않는다. 센터가 문을 열던 무렵에도 실제 투자 대상과 금융지원 방식, 집행 일정은 구체화되지 않았다는 보도가 나왔다. 법과 기관과 협약은 생겼지만, 돈이 흘러간 기록은 아직 없다.
트럼프가 이어서 "수십억 달러를 쓰고 있다"고 소개한 한화의 필라델피아 조선소가 이 상태를 잘 보여 준다. 한화시스템과 한화오션은 2024년 12월 1억 달러에 필라델피아의 필리조선소를 인수했다. 마스가 합의보다 먼저다. 한화는 2025년 8월 독과 안벽을 늘려 한 해 최대 20척을 짓겠다는 50억 달러 증설 계획을 발표하면서 이를 한국의 1500억 달러 약속의 일부라고 밝혔다. 지금까지 실제로 들어간 돈은 한화가 밝힌 2억 달러 이상이다. 2026년 9월 한화 관계자는 확장 계획은 세우고 있다고 했다. 다만 실행은 마스가 자금이 들어오고 미국 정부가 규제를 풀어야 가능하다고 말했다. 트럼프가 성과로 꼽은 사업은 대부분 아직 계획이고, 그 계획은 마스가가 돌아가야 시작된다.
'관세를 산 값'이라는 말이 무거운 이유
'관세를 깎으려고 낸 값'이라는 두 번째 주장은 근거가 있다. MOU에는 한국이 투자금을 내지 않으면 미국 대통령이 정하는 관세를 매길 수 있다는 조항이 있다. 한국이 성실히 이행하는 동안에는 미국이 합의한 관세 약속을 지킬 '의도'를 갖는다고도 적혀 있다. MOU는 스스로 법적 구속력이 없다고 밝힌다. 하지만 관세를 올리는 것은 미국 대통령이 결정할 일이어서, 이 조항은 그대로 압박 수단이 된다. 김정관 장관은 10월 초 이렇게 털어놨다. "사업성이 떨어지면 돈을 안 대고 나와야 하지만, 문제는 MOU상 사업에서 철수하면 미국이 관세를 올리는 등 보복하게 돼 있다는 점." 그래서 협상 내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것이다.
투자와 관세의 연결은 올해 들어 더 무거워졌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2월 20일 판결에서, 트럼프가 상호관세의 근거로 삼은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이 대통령에게 관세를 매길 권한을 주지 않는다고 봤다. 이 법에 기댄 상호관세가 무너지면서, 합의로 낮춘 15% 상호관세도 함께 사라졌다. 행정부는 임시관세를 거쳐 7월 24일부터 무역법 301조 관세로 갈아탔다. 강제노동을 이유로 한 관세다. 지금 한국산 일반 상품에는 기본관세를 합쳐 12.5%가 붙는다. 관세의 법적 근거가 이렇게 바뀌는 동안 한국이 기댈 곳은 문서가 아니라 미국의 말이다. 김정관 장관은 사업 합의문에 관세를 넣지 못했다고 했다. 다만 미국이 어떤 법을 쓰든 15% 수준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혀 왔다고 설명했다. 관세 약속이 문서로 보장되지 않는 상태에서, 미국이 한국의 '성실한 이행'을 따질 잣대는 투자뿐이다. 그래서 트럼프가 투자를 '관세를 산 값'이라고 부르면, 그 값을 얼마나 치렀는지를 정하는 말도 트럼프 쪽에서 나오게 된다.
알래스카에서 이미 본 장면
이 구조가 실제로 어떻게 쓰이는지는 지난주 알래스카 LNG 사업에서 드러났다. 9월 30일 트럼프는 백악관에서 한국이 알래스카 LNG 사업에 약 540억 달러를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한미가 실제로 합의한 것은 검토를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사업성이 확인되고 국내법 요건을 갖출 때만 추진한다는 조건도 붙어 있었다. 김정관 장관은 이튿날 미국 발표가 "양국이 합의한 내용보다 훨씬 더 많이 나갔다"며 러트닉 장관에게 이의를 제기했다고 밝혔다. 미국 발표에는 미국 국내 정치 일정이 반영됐다고도 설명했다. 그러자 10월 2일 트럼프는 성급한 발표 아니었느냐는 질문을 받고, 한국이 곧 서명하지 않으면 "두 배 청구"하겠다고 답했다. 무엇을 두 배로 하겠다는 것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순서를 정리하면 이렇다. 먼저 조건이 붙은 약속을 확정된 금액으로 발표한다. 한국이 확정이 아니라고 하면, 그 차이를 한국의 지연으로 바꿔 불이익을 예고한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올해 1월에도 트럼프는 한국 국회가 특별법 처리를 미룬다며 관세를 25%로 올리겠다고 발표했다. 10월 6일의 '1500억 달러를 줬다'는 말은 아직 압박으로 넘어가지 않았을 뿐, 같은 순서의 첫 단계에 서 있다. 11월 3일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에게 외국에서 받아낸 돈은 내세울 실적이다. 실적을 실제보다 크게 말할수록, 그 차이는 한국이 메워야 할 빚처럼 보이게 된다.
약속이 돈이 되려면 미국도 움직여야 한다
트럼프의 문장에서 빠진 것은 이 약속의 반대편이다. 조선협력은 한국이 돈을 내면 끝나는 구조가 아니다. 지원할 사업이 있어야 하고, 사업이 생기려면 미국의 발주와 규제 완화가 따라와야 한다. 김정관 장관은 7월 조선협력센터 개소식에서 한국은 1500억 달러를 이행할 준비가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에 지속적인 발주, 강력한 인센티브, 동맹 친화적 규제 환경을 요청했다. 같은 자리에서 러트닉 장관은 "얼마나 많은 MOU에 서명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선박이 미국에서 건조됐는지로 성공을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이 세운 잣대로 보더라도 성과는 미국 조선소에서 배가 나와야 생긴다. 그런데 앞에서 본 대로 한화의 조선소는 미국이 규제를 풀어 주지 않으면 넓어지지 않는다. 한국 조선소가 미 해군 함정을 직접 지으려면 외국 조선소의 함정 건조를 막는 미국 법도 넘어야 한다.
그래서 '한국이 1500억 달러를 줬다'는 말은 숫자를 부풀리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이행이 늦어진다면 그 원인에는 미국의 발주와 규제도 들어간다. 그런데 '이미 줬다'는 말은 그 원인을 지우고 한국의 약속만 남긴다.
한국 정부가 할 일
이번 연설에서 새 관세율이나 추가 투자 요구가 나오지는 않았다. 당장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러나 알래스카에서 보듯, 과장된 숫자는 며칠 만에 '서명하지 않으면 두 배'라는 압박으로 바뀐다. 한국 정부는 알래스카 발표 때 그랬듯 1500억 달러에 대해서도 무엇이 약속이고 무엇이 집행인지 공개적으로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확인한 자료에서 정부가 10월 6일 발언에 따로 답한 기록은 없다. 어떤 대출·보증·기업투자를 1500억 달러에 넣는지 정한 공개 기준도 보이지 않는다. 정부는 산입 기준과 실제 집행액, 그리고 미국이 맡아야 할 발주·규제 조건을 직접 정리해 내놓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미 줬다'와 '아직 덜 냈다' 사이의 빈칸은 다음에도 미국 대통령의 말로 채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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