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제형사재판소 통째로 제재…노벨상 분풀이 아닌 1년 예고된 압박
미국 정부가 2026년 10월 9일 국제형사재판소(ICC)를 기관째 제재 대상에 올렸다. ICC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상설 국제재판소다. 집단살해·반인도적 범죄·전쟁범죄를 저지른 개인을 재판한다. 설립 조약인 로마규정에 125개국이 가입했고, 미국과 이스라엘은 가입하지 않았다. 미국은 2025년부터 ICC 검사장과 판사를 한 사람씩 제재해 왔는데, 이번에는 재판소 자체를 겨냥했다.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트럼프 대통령은 ICC가 미국인을 기소하도록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 '불량 법정'과의 거래를 막아 자원을 끊고 운영 능력을 무너뜨리겠다고 말했다.
노벨상 탈락에 화가 나서 제재했나
같은 날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법률가 나비 필라이에게 노벨평화상을 줬다. 필라이는 2003~2008년 ICC 재판관을 지냈다. 최근까지는 이스라엘이 가자에서 집단살해를 저질렀다고 판단한 유엔 조사위원회를 이끌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날 저녁 뉴욕주 시라큐스 유세에서 선정이 부패했다고 말했다. 전쟁 8건을 끝낸 자신이 상 8개를 받았어야 했고, 이번 결정은 노르웨이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이 될 것이라고도 했다. 밤늦게 올린 게시물에서는 필라이가 "이스라엘을 증오한다"고 썼고, 남북한 사이와 일본·북한 사이의 전쟁도 자신이 막고 있다고 주장했다.
국내에서는 이 두 일이 노벨상 탈락에 트럼프가 폭발하자 미국 정부가 제재를 발표했다는 이야기로 전해졌다. 실제 순서는 반대다. 노벨상은 미국 동부시간 새벽 5시(오슬로 오전 11시)에 발표됐고, 루비오의 제재 발표는 그로부터 약 다섯 시간 뒤인 오전에 나왔다. 그 시점까지 트럼프는 노벨상에 대해 직접 말하지 않았다. 그의 계정이 노벨위원회가 "회복할 수 없을 만큼 스스로 수치를 당했다"는 전 변호사 데이비드 쇼언의 글을 공유했을 뿐이다. 트럼프의 직접 비판은 제재가 공개된 뒤인 저녁 유세에서 나왔다. 그리고 제재의 출발점은 노벨상보다 훨씬 앞에 있다.
제재는 무엇을 했나: 동결, 그리고 6개월 시한
그 출발점을 보기 전에 무엇이 결정됐는지부터 정확히 짚는다. 미국 재무부 해외자산통제국(OFAC)은 ICC를 특별지정 제재대상 명단에 올렸다. 근거는 새 법이 아니라, 트럼프가 2025년 2월 ICC 관계자를 제재하려고 서명한 행정명령 14203이다. 이에 따라 미국 안에 있거나 미국인·미국 기업이 보유·관리하는 ICC 재산이 동결되고, 미국인이 하거나 미국을 거치는 ICC 관련 거래는 원칙적으로 금지된다. 보도된 'ICC의 모든 자산 동결'은 ICC의 전 세계 자산을 몰수한다는 뜻이 아니다. 미국의 손이 닿는 범위의 재산을 묶는다는 뜻이다.
'6개월 안에 거래를 끊어야 한다'는 설명은 같은 날 함께 나온 일반허가에서 나왔다. 일반허가 13은 회원국 분담금, 직원 급여와 건강보험, 임대료·공공요금처럼 재판소를 운영하거나 정리하는 데 필요한 거래를 2027년 4월 7일까지 허용한다. 통신·업무용 소프트웨어, 연금, 수감자 구금 유지에 필요한 거래는 기한 없는 별도 허가로 열어 뒀다. 다시 말해 제재는 이미 발효됐고, 일상 운영만 반년 동안 이어 가게 해 둔 것이다. 미국 국무부는 이 기간을 회원국들이 미국의 우려를 외교·법률적으로 해결하는 진전을 보일 시간이라고 설명했다. 결과에 따라 허가를 조정할 수 있다고도 했다. 이 6개월은 유예라기보다 미국의 요구에 답하라는 시한이다.
노벨상보다 먼저 정해진 수순
미국이 무엇에 답하라는지는 열 달 전에 이미 나와 있었다. 2025년 12월 트럼프 정부 관계자는 로이터 취재에서 ICC와 회원국에 세 가지를 요구했다고 말했다. 트럼프와 고위 당국자를 수사하지 못하게 로마규정을 고칠 것, 이스라엘 지도부에 대한 수사를 철회할 것, 미국인이 관련된 아프가니스탄 수사를 공식 종료할 것이다. 응하지 않으면 재판소 자체를 제재할 수 있다고도 했다. 2026년 7월 이후 보도에서는 비회원국 국민을 기소하지 말 것,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요아브 갈란트 전 국방장관에 대한 체포영장을 취소할 것이라는 요구가 전해졌다. 같은 7월 미국은 회원국들에 탈퇴를 압박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9월 22일에는 트럼프가 유엔총회 연설에서 회원국들에 ICC를 떠나라고 촉구했다.
제재의 형태도 노벨상 발표보다 3주 먼저 알려졌다. 9월 20일 로이터와 월스트리트저널은 미국이 ICC 전체에 대한 제재를 준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대부분의 거래를 금지하되 6~7개월 유예를 둔다는 구상으로, 실제 발표와 같은 구조다. ICC도 이를 알고 대비했다. 나자트 샤밈 칸 ICC 부검사는 9월 25일 인터뷰에서 사무용 소프트웨어를 Microsoft에서 독일 오픈소스 제품으로 바꾸고 은행·건강보험 우회 방안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직원 급여도 몇 달치 미리 지급했다.
그러니 노벨상 결과가 제재를 불러왔다고 볼 근거는 없다. 미국 관리들은 수개월 준비한 제재이고 노벨상과 같은 날 나온 것은 우연이라고 해명했다. 이해당사자의 말이지만 앞의 기록과 맞는다. 발표 날짜를 고르는 데 노벨상이 영향을 줬는지는 공개 자료로 가릴 수 없다. 설령 영향을 줬더라도 바뀌는 것은 발표일 하루이고, 제재의 이유는 그대로다. 그래도 두 사건이 한데 엮여 읽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노벨위원회는 선정 발표문에서 "재판관들이 제재받고 그들의 기관이 공격받는" 지금 용기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썼다. 국제사법을 지켜야 한다는 상과 국제사법 기관을 겨냥한 제재가 같은 날 정반대 방향을 가리킨 셈이다.
갈등의 뿌리: 동의하지 않은 나라의 국민을 재판할 수 있나
미국의 요구가 노벨상에서 오지 않았다면, 그 뿌리는 ICC가 누구를 재판할 수 있느냐는 관할권 문제다. 로마규정 12조에 따르면 범죄가 일어난 나라나 피의자의 국적국 가운데 한 곳만 당사국이어도 ICC가 사건을 다룰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당사국이다. ICC는 2021년 팔레스타인의 가입을 근거로 가자·서안·동예루살렘에 관할권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당사국이 아닌 미국과 이스라엘의 국민도 이 지역에서 벌어진 일로 수사를 받을 수 있다. 실제로 ICC는 2020년 미군·CIA의 고문 혐의를 포함한 아프가니스탄 수사를 허가했다. 2024년 11월에는 네타냐후와 갈란트에게 굶주림을 전쟁 수단으로 쓴 전쟁범죄 등의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미국은 자국이 동의하지 않았는데 자국민을 재판하는 것은 주권 침해라고 본다. 이는 트럼프 정부만의 입장이 아니다. 바이든 정부의 네드 프라이스 국무부 대변인도 2021년 ICC 관할권은 동의한 나라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회부한 사건에 한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대응은 정부마다 달랐다. 트럼프 1기 정부는 2020년 아프가니스탄 수사를 이유로 ICC 검사장 등을 제재했고, 바이든 정부는 2021년 이 제재를 풀었다. 트럼프 2기 정부는 2025년 2월 카림 칸 검사장을 제재했고, 6월에는 판사 4명을 추가로 제재했다. 2026년 9월에는 소장과 부검사까지 제재 대상이 됐다. ICC에 따르면 지금까지 제재받은 판사와 검찰 관계자는 13명이다. 이번 조치는 개인을 겨누던 제재를 기관 전체로 넓힌 마지막 단계다.
원칙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
국제재판소가 동의하지 않은 나라의 국민을 재판할 수 있느냐는 미국이 정권과 상관없이 내세워 온 법적 주장이고, 그 자체로 따져 볼 만한 쟁점이다. 그러나 이번 제재를 이 원칙으로 정당화하기는 어렵다.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요구가 원칙보다 좁고 구체적이다. 원칙이 문제라면 비당사국 국민 일반에 적용할 규칙을 다투면 된다. 그런데 미국의 요구에는 트럼프와 고위 당국자를 수사 대상에서 빼라는 것과 특정한 두 사람의 영장을 취소하라는 것이 들어 있다. 네타냐후와 갈란트의 영장은 재판부가 범죄 책임을 믿을 합리적 근거가 있다고 판단해 내린 결정이다. 재판소가 개별 사건의 결정을 외부 압력에 따라 거두면 그 결정은 더 이상 재판이라고 할 수 없다.
둘째, 미국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줄 권한이 재판소에 없다. ICC가 로이터 질의에 답했듯 로마규정 개정은 당사국들의 권한이다. 이번 제재는 재판소의 은행과 보험을 끊어 125개 당사국에 조약을 고치라고 압박하는 구조다. 게다가 로마규정에는 이미 ICC의 개입을 피할 길이 있다. 피의자의 나라가 스스로 진정한 수사와 기소를 하면 ICC가 물러서는 보충성 원칙이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사건에서 국내 수사를 마쳤다고 주장했다. ICC 검찰은 고문 정책을 설계·승인·감독한 책임자는 조사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이 다툼은 조약이 정한 절차 안에서 이어갈 수 있었다.
셋째, 원칙을 미국 자신에게 적용하면 맞지 않는다. 미국의 논리는 동의하지 않은 나라가 남의 사법권에 묶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번 제재는 형식상 미국인과 미국을 거치는 거래에만 적용된다. 그러나 세계 금융과 IT가 미국 기업과 미국 경유 결제에 기대고 있어, 실제로는 미국 밖 기업의 선택까지 묶는다. ICC 직원 건강보험을 맡던 보험사 AXA는 계약을 끝내면서 미국 제재의 역외 적용 위험 때문에 복잡하고 민감한 사안이라고 설명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제재 이후에도 ICC와 거래할 은행을 찾으려 했지만 은행 설득에 실패했다. 자국민이 동의하지 않은 재판소에 서는 것을 주권 침해라고 부르는 미국이, 재판소를 세운 125개국이 동의한 적 없는 자국 제재의 효과를 그 나라 기업들에까지 미치게 하고 있다.
6개월 뒤를 가르는 것
미국의 압박은 아직 회원국들을 돌려세우지 못했다. 캐나다·덴마크·독일·프랑스·이탈리아·일본·네덜란드·영국 외교장관은 제재 당일 공동성명에서 "강하게 반대한다"고 밝혔다. EU 외교안보 고위대표도 ICC는 국가 자체를 겨냥하지 않고 보충성 원칙에 따라 움직인다며 철회를 요구했다. 일본 모테기 외무상은 제재가 법치를 지지해 온 일본의 입장과 양립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ICC와 회원국이 재판소 운영의 과제에 대응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반면 네타냐후 총리실은 ICC를 민주국가와 국가주권을 위협하는 정치적 기관이라 부르며 제재를 환영했다. 로마규정 탈퇴를 유엔에 통보한 나라는 베네수엘라·차드·나우루 셋이다. 탈퇴 효력은 통보 1년 뒤인 2027년 7~9월에 생긴다. 미국의 요청이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난 곳은 차드다. 차드 외교부는 탈퇴 발표 나흘 전 미국이 ICC 가입을 재검토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밝혔다.
그렇다고 ICC가 버틸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일반허가는 거래를 허용할 뿐, 은행과 업체에 거래를 계속하라고 강제하지 않는다. 제재 위험을 피하려는 업체는 시한 전에도 떠날 수 있다. ICC 피해자신탁기금은 피해자 배상과 회복 지원에 필요한 금융 경로가 막힐 수 있다고 경고했다. EU 집행위원회는 ICC와 EU 기업을 보호할 조치를 취할 준비가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미국 제재의 역외 효과를 막는 EU 제재차단법을 ICC 제재에 적용하기로 했다는 결정은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회원국들은 12월 헤이그에서 열리는 회원국총회에서 대응을 논의한다. 이 회의는 원래 뉴욕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9월 소장·부검사 제재 뒤 장소를 헤이그로 옮겼다.
정리하면 10월 9일의 제재는 트럼프의 노벨상 분풀이가 아니라 1년 가까이 예고된 압박의 마지막 단계다. 이 압박이 겨누는 것은 '비당사국 국민 일반'이라는 원칙보다 미국과 이스라엘 지도자에 대한 구체적인 수사와 영장이다. 수단은 재판소를 세운 나라들이 동의한 적 없는 금융 봉쇄다. 2027년 4월 7일까지 회원국들이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일지, 아니면 재판소가 미국 금융망 밖에서 운영할 길을 찾을지가 국제 형사재판의 다음 모습을 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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