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 국제

젤렌스키, 트럼프 '에너지 휴전' 사흘 만에 러시아 정유시설 공격 재개…EU엔 내년 700억 유로 요청

10월 15일 새벽, 러시아 랴잔주의 정유시설에서 불이 났다. 모스크바 남동쪽에 있는 랴잔 정유시설은 연간 원유 처리능력이 1,700만~1,800만t에 이르는 러시아의 대형 정유시설이다. 그 몇 시간 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인터뷰에서 러시아 정유시설 공격을 두고 "제동은 풀렸다. 끝났다"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에너지 휴전'을 발표하고,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정유시설 공격을 멈춘 지 약 사흘 만이었다. 다음 날 젤렌스키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EU) 정상회의에서 내년 전쟁 비용을 1,550억 유로로 추산하고, 유럽에 최소 700억 유로를 더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사흘 만에 끝난 '에너지 휴전'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의 공격 재개를 "수치"라고 했다. 러시아 대통령실(크렘린)은 우크라이나가 처음부터 휴전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기록을 따라가 보면 그림이 다르다. 이 휴전은 러시아가 동의를 확인한 적 없는 발표였고, 사흘 동안 공격을 멈춘 쪽은 우크라이나뿐이었다. 젤렌스키는 한쪽만 지키던 휴전에서 빠져나왔고, 미국에 기대기 어려워진 몫을 유럽에서 구하려 하고 있다. 유럽은 그 부족액을 인정했지만, 돈을 어떻게 마련할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미국이 원한 것은 경유값이었다

이 휴전 이야기는 경유값에서 시작한다. 2026년 이란 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 운송이 막히면서 중동의 정유제품 공급이 줄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으로 정유시설이 멈추자 7월부터 경유 수출을 막았다. 세계 경유 공급이 줄면서 미국 경유 소매가는 9월 22일 갤런당 6.53달러까지 올랐다. 11월 3일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 행정부는 우크라이나에 러시아 정유시설 공격을 멈추라고 거듭 요청했다. Axios에 답한 익명의 미국 관리는 우크라이나가 이 요청을 여섯 번쯤 따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트럼프가 미국 소비자의 가격 부담 때문에 우크라이나의 일방적 공격 중단을 원했고,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정유시설 공격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력망 공격을 같은 무게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이 처음부터 공격을 멈추라고 요구한 쪽은 우크라이나였다.

그리고 10월 9일 트럼프는 러시아와 거래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통화한 뒤, 러시아가 경유를 즉시 30만t 넘게, 11월에 50만t, 그 직후 100만t, 정유시설 상태에 따라 추가로 300만t을 미국과 세계 시장에 공급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같은 날 미국 재무부 해외자산통제국(OFAC)은 일반면허 135를 내 2027년 4월 7일까지 러시아산 경유 거래를 허용했다. 이 면허에는 물량 상한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에너지시설 공격을 멈춰야 한다는 조건도 없다. 앞의 미국 관리는 우크라이나가 공격 중단 요청을 따르지 않은 것이 이 거래의 계기였다고 말했다. 제재로 막혔던 러시아의 경유 판매 길이 아무 조건 없이 열린 것이다. 젤렌스키는 이 거래를 "푸틴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불렀다. 미국 상원의원 12명(공화·민주 각 6명)도 거래가 러시아의 전쟁 자금을 늘린다며 철회를 요구했다.

러시아가 동의를 확인한 적 없는 휴전

이틀 뒤인 10월 11일, 트럼프는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에너지 휴전에 동의했고 휴전이 즉시 발효한다고 썼다. 에너지 휴전은 전쟁 전체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발전소나 정유시설 같은 서로의 에너지 시설만 공격하지 않기로 하는 부분 휴전이다. 그런데 발표에는 어떤 시설을 언제까지 보호하는지가 없었다. 젤렌스키는 발표를 보고 처음 알았다면서, 러시아가 동의하면 우크라이나도 따르겠다고 했다. 백악관 관계자는 Axios에 이 구상이 정유시설 상호 공격 중단부터 시작하는 제안이며 러시아가 검토 중이라고 설명했다. 크렘린 대변인 드미트리 페스코프는 14일에도 구체적인 조건이 합의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발표된 휴전을 따르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쪽은 우크라이나뿐이었다.

사흘 동안 멈춘 쪽은 우크라이나뿐이었다

우크라이나는 발표 뒤 약 사흘 동안 러시아 정유시설 공격을 실제로 멈췄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에너지시설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발표 당일 저녁 하르키우 제5열병합발전소가 공격받았고, 12일에는 우크라이나 에너지시설 여섯 곳이 공격받았다. 13일에는 젤렌스키가 키이우 화력발전소를 겨냥한 탄도미사일 공격을 보고했다. 14일에는 러시아 국방부가 직접 우크라이나의 에너지 기반시설 일곱 곳과 데이터센터를 타격했다고 발표했다. 12일 러시아의 공격에 대해 질문받은 트럼프는 "양측에 위반이 있었다"고만 답했다.

'배신감'과 공격 재개

이 사흘을 겪은 우크라이나의 처지는 14일 공개된 영국 언론인 피어스 모건의 인터뷰에 드러난다. 모건은 경유 거래, 휴전 발표 뒤에도 이어진 러시아의 에너지시설 공격, 우크라이나군이 쓰는 위성통신의 제한을 차례로 들고 배신감을 느끼느냐고 물었다. 위성통신 제한은 스페이스X의 군용 위성통신 스타실드에 걸린 속도 제한을 말한다. 로이터는 미국 관리들을 인용해 이 제한 지시가 백악관 안에서 나왔다고 보도했고, 트럼프는 미국의 책임을 부인했다. 젤렌스키는 "솔직히, 우리끼리 얘기지만 그렇다"고 답했다. 다만 자신의 감정보다 국가의 생존과 미국이라는 동반자가 걸린 더 복잡한 문제라고 덧붙였다.

그렇다고 젤렌스키가 미국의 요구를 끝내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15일 보도된 FT 인터뷰에서 그는 러시아가 계속 공격하더라도 백악관과의 관계를 위해 정유시설 공격을 멈출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미국산 패트리엇 요격미사일을 더 받는다면 동의할 수 있고 그것이 최소 조건이라고 답했다. 패트리엇은 러시아의 탄도미사일을 꾸준히 떨어뜨릴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방공 무기로 꼽힌다. 러시아의 에너지시설 공격이 계속되는 한, 혼자 공격을 멈추려면 그 공격을 막을 수단부터 달라는 요구로 읽힌다. 그는 공격을 멈추면 미국과 러시아가 다음에는 가스 거래로 넘어갈 것이라는 우려도 밝혔다.

그리고 14일 밤부터 15일 아침 사이 랴잔 정유시설이 공격받았다. 파벨 말코프 랴잔주 주지사는 대규모 드론 공격으로 정유시설 부지에 화재가 났다고 밝혔다. 러시아 국방부는 순항미사일 4기와 드론 69대를 요격했고 격추된 드론의 잔해가 떨어져 불이 났다고 주장했다. AP가 취재한 우크라이나 고위 당국자는 익명을 전제로 우크라이나의 공격이라고 확인했다. 피해는 정유시설 전체에 미치지는 않았다. 16일 로이터는 업계 소식통을 인용해 원유 증류장치 CDU-6이 멈추고 배관 여러 곳이 손상됐지만, 다른 증류장치 세 개는 계속 돌아 정유시설이 부분 가동 중이라고 보도했다. CDU-6은 9월 공격 때도 멈췄던 장치여서, 이번 공격으로 생산이 얼마나 더 줄었는지는 계산할 수 없다.

휴전을 깬 쪽은 어디인가

크렘린과 트럼프는 휴전이 깨진 책임을 우크라이나에 돌렸다. 페스코프는 15일 우크라이나가 휴전을 지켰다고 보지 않는다며 정유시설 공격이 미국의 평화 노력에 배치된다고 말했다. 푸틴은 최근 정유시설 공격의 피해가 크지 않다면서, 러시아의 에너지시설 타격은 대응일 뿐이고 "그들이 먼저 시작했다"고 했다. 트럼프는 같은 날 미국 방송 뉴스맥스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의 공격 재개가 세계 유가를 올리는 "수치"라고 비판하고, 젤렌스키가 푸틴보다 상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 설명들은 기록과 맞지 않는다. 우선 러시아는 휴전에 동의했다고 밝힌 적이 없다. 페스코프 자신이 하루 전까지 조건이 합의되지 않았다고 했다. 러시아가 동의하지 않은 휴전이라면, 우크라이나의 공격 재개를 휴전 파기라고 부를 근거도 없다. 다음으로, 우크라이나가 공격을 멈춘 사흘 동안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에너지시설을 계속 공격했고 러시아 국방부가 그 사실을 직접 발표했다. 반면 그 사흘 동안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정유시설을 공격했다는 확인은 없다. 우크라이나가 휴전을 지키지 않았다는 페스코프의 말은 이 순서를 뒤집은 것이다.

트럼프의 잣대는 상대에 따라 달라졌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에너지시설을 공격했을 때 그는 "양측 위반"이라고 했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정유시설 한 곳을 공격하자 "수치"라고 했다. 두 발언을 가른 것은 휴전 위반 여부가 아니라 유가였다. 미국 연료값을 최우선으로 둔 트럼프 자신의 기준으로는 앞뒤가 맞는다. 그러나 양쪽의 에너지 공격을 함께 멈추게 하겠다는 중재자의 기준으로 보면, 같은 종류의 공격을 한쪽에만 문제 삼은 것이다.

러시아의 다음 공격도 같은 방식으로 설명됐다. 15일 밤부터 16일 아침까지 러시아는 키이우와 네 개 주의 에너지시설을 공격했고, 일부 지역에 정전이 났다. 발레리 게라시모프 러시아군 총참모장은 이 공격을 대러 공격에 대한 대응이라고 푸틴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에너지시설 공격은 랴잔 공격 전 사흘 동안에도 이어지고 있었다. 16일 공격을 랴잔에 대한 보복으로 보기는 어렵다.

브뤼셀에서 내민 요청

미국과의 관계가 이렇게 틀어진 다음 날, 젤렌스키는 유럽에 손을 내밀었다. 16일 EU 정상회의 연설에서 그는 내년 전쟁 비용을 1,550억 유로로 추산하고, 방위와 무기, 국가의 회복력을 위해 최소 700억 유로가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탄도미사일을 막을 패트리엇 요격미사일 300발을 겨울 패키지로 달라고 했고, EU 안에 묶여 있는 러시아 동결자산을 우크라이나 장기 지원에 쓰자고 제안했다. 경유 거래에 대해서는 "이 전쟁에 쓰일 돈을 푸틴의 주머니에 직접 더 넣어주게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700억 유로는 이미 약속된 지원 위에 얹는 돈이다. EU는 2026~2027년 우크라이나에 900억 유로를 빌려주는 차관을 확정해 두었고, 그중 2027년분은 450억 유로다. 이 차관만으로 모자라는 몫을 우크라이나 정부는 둘로 나눠 설명해 왔다. 세르히 코레츠키 우크라이나 총리는 14일, 2027년 국가예산에서 외부 지원으로 메워야 할 부족액이 약 300억 유로이고, 국가예산 밖에서 군이 필요로 하는 돈의 부족액이 약 400억 유로라고 밝혔다. 두 액수를 더하면 젤렌스키가 요청한 700억 유로와 맞는다. 1,550억 유로는 이보다 넓은 숫자다. 우크라이나 재무 당국의 앞선 설명을 보면, 이들이 말하는 전쟁 비용에는 국가예산뿐 아니라 동맹국이 현물로 주는 무기 지원까지 들어간다. 숫자가 여럿 나오자 크리스티안 슈토커 오스트리아 총리는 부족액이 어디서 생겼는지 투명하게 설명하라고 요구했다.

패트리엇 요청은 FT 인터뷰에서 내건 조건과 같은 필요에서 나왔다. CNN은 15일 익명 취재원을 인용해 우크라이나의 패트리엇 요격미사일이 바닥났다고 보도했다. 젤렌스키는 유럽에 요청량을 채울 PAC-2·PAC-3 요격미사일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고를 가진 스페인과 그리스는 자국 재고 보충과 안보를 걱정해 주저하고 있다고 키이우인디펜던트는 전했다. 미국에서 얻지 못한 방공 수단을 이제 유럽에서 구해야 하는 처지다.

유럽은 부족액을 인정했지만 돈은 정하지 못했다

정상회의는 요청에 바로 답하지 않고 숙제를 넘겼다. 안토니우 코스타 유럽이사회 의장은 정상들이 EU 집행위원회에 2027년 추가 재원 제안을 마련하라고 요구했다고 밝혔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2027년 부족액이 700억 유로라고 인정하면서, 그 3분의 1은 다른 국제 파트너가 맡아야 한다고 했다. 이 회의에서 새로 승인된 돈은 없다. 14일 우크라이나에 지급된 방위비 28억6천만 유로는 기존 900억 유로 차관에서 나간 돈이다.

돈을 어디서 마련할지를 두고 회원국은 갈렸다. 크리스텐 미할 에스토니아 총리는 추가 EU 차관이 유력하다고 봤다. 반면 로베르트 피초 슬로바키아 총리는 추가 차관에 참여하지 않겠다며 헝가리도 같은 입장이라고 전했다. 러시아 동결자산을 쓰자는 안에는 독일·스페인·네덜란드와 북유럽·발트 국가들이 찬성했고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유보적이었다. 자산 대부분을 보관하는 벨기에의 바르트 더베버 총리는 동결자산은 종전 평화협상에서 다룰 일이라며 조기 활용 논의 자체를 거부했다. 로프 예턴 네덜란드 총리는 11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열리는 비공식 정상회의에서 합의하기는 이르다고 내다봤다.

우크라이나는 무게를 옮겼고, 유럽은 아직 답하지 않았다

이번 주 일어난 일을 순서대로 놓으면 이렇다.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의 일방적 정유시설 공격 중단을 원했다. 그것이 통하지 않자 러시아의 경유 판매를 조건 없이 풀어 줬고, 이어 러시아의 동의가 확인되지 않은 휴전을 발표했다. 우크라이나는 사흘 동안 그 휴전을 혼자 지켰고, 러시아의 에너지시설 공격이 계속되자 공격을 재개했다. 랴잔 공격을 휴전 파기로 부르는 크렘린과 트럼프의 설명은 이 순서를 지운다. 휴전이 무너진 것은 한쪽만 지켰기 때문이다.

공격을 재개한 다음 날 젤렌스키가 브뤼셀로 간 것은, 미국 대신 기댈 곳을 유럽에서 찾겠다는 선택이다. 유럽은 700억 유로라는 부족액을 인정했다. 그러나 추가 차관에는 불참을 선언한 나라가 있고, 동결자산 활용은 자산을 가진 벨기에가 막고 있다. 그사이 러시아의 에너지시설 공격은 계속되고, 패트리엇 요격미사일은 바닥났다는 보도가 나온다. 이번 정상회의가 우크라이나에 내놓은 것은 제안을 만들라는 요구 하나이고, 그 요구가 실제 돈이 되기까지 넘어야 할 반대는 이미 회의장에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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