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 사회

한강·김영하 등 한국 작품 21편, 앤트로픽 '해적판 합의' 목록에…사들여 간 한국어 책은 보상 밖

미국 인공지능(AI) 기업 앤트로픽은 작가들에게 15억 달러(약 2조 원)를 내기로 저작권 합의를 했다. 이 합의의 보상 대상 목록에 한국 작가 작품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 10월 15~17일 잇따라 보도됐다. 앤트로픽은 대화형 AI '클로드'를 만드는 회사다. 목록에서 확인된 작품은 한강의 『소년이 온다』·『채식주의자』·『흰』, 김영하의 『빛의 제국』·『검은 꽃』,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 김숨의 『한 명』, 황선미의 『마당을 나온 암탉』, 황석영의 『손님』 등의 영문 번역판이다.

한국문학번역원이 2월에 보낸 안내문

정부 쪽은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한국문학번역원은 한국 문학의 번역과 해외 출판을 지원하는 기관이다. 번역원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내용을 전달받아 2026년 2월 작가들에게 '미국 AI 기업의 저작권 침해에 따른 한국문학 작가 피해 구제 안내' 공문을 보냈다. 공문에는 합의 사이트와 신청 방법, 지급 절차, 3월 30일 마감일이 담겼고, 주변 작가들에게도 알려 달라는 요청이 붙었다. 번역원이 파악한 대상은 작가 20명·작품 21편이다. 번역원은 안내받은 작가들이 직접 또는 에이전시를 통해 신청하겠다는 뜻을 전해 왔다고 설명했다.

목록은 해적판 다운로드 명단이다

목록이 무엇인지 알려면 목록을 만든 미국 소송부터 봐야 한다. '바츠 대 앤트로픽'은 작가 안드레아 바츠 등이 2024년 8월 캘리포니아 북부 연방지방법원에 낸 집단소송이다. 이 소송은 앤트로픽이 책을 어떻게 손에 넣고 복제해 AI 학습에 썼는지를 문제 삼았다. 소송 과정에서 앤트로픽이 2021~2022년 해적 전자책 사이트 LibGen과 PiLiMi에서 수백만 권을 내려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중복을 빼면 약 400만 작품이다.

법원 판단은 학습과 보관을 갈랐다. 윌리엄 앨섭 판사는 2025년 6월, 책을 AI 학습에 쓰려고 복제한 것은 공정이용이라고 봤다. 공정이용은 저작권자의 허락 없이도 허용되는 이용이다. 그러나 해적본을 언젠가 쓸 데가 있으리라며 사내 '중앙 도서관'에 쌓아 둔 것은 공정이용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이 부분의 책임과 손해배상은 재판에서 가리기로 했다. 재판을 앞두고 양측은 2025년 9월 15억 달러 합의서에 서명했고, 법원은 2026년 7월 20일 합의를 최종 승인했다. 합의에 앤트로픽의 책임 인정은 들어 있지 않다.

이 합의의 보상 대상은 해적 사이트에서 내려받은 책 가운데 요건을 갖춘 것뿐이다. ISBN 같은 도서 식별번호가 있고, 출판 뒤 5년 안에 미국 저작권청에 등록된 작품이어야 한다. 이 요건을 통과한 작품이 482,460개다. 합의 관리자 설명에 따르면 약 400만 작품 가운데 비영어 작품 약 250만 개는 대부분 미국에 등록되지 않아 빠졌다. 한국어 원서가 아니라 미국에 등록된 영문 번역판만 목록에 오른 까닭이다.

목록에 올랐다는 것의 뜻

그러니 목록에 올랐다는 것은 그 책의 영문판을 앤트로픽이 해적 사이트에서 내려받았다는 뜻이다. 그 책이 클로드 학습에 쓰였다는 개별 확인은 아니다. 일부 보도는 앤트로픽이 한국 작가의 책을 '무단으로 AI 학습에 활용'했다고 썼지만, 목록은 다운로드와 등록 요건을 기준으로 만들어졌다. 앤트로픽은 합의서에서 LibGen·PiLiMi 데이터가 자사가 상용 출시한 모델의 학습 말뭉치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이 진술은 두 데이터 묶음과 상용 모델에 한정된다. 같은 작품을 다른 경로로 구해 학습에 썼을 가능성까지 부정하지는 않는다.

합의가 무엇을 해결했는지에 대한 양측 설명도 이 구분을 따른다. 앤트로픽 법무 부책임자 아파르나 스리다르는 학습이 공정이용이라는 판단은 유지되며 합의는 '특정 자료의 취득 방식'에 관한 제한된 청구를 해결한다고 밝혔다. 원고 측 대리인 저스틴 넬슨은 해적 사이트에서 작품을 가져간 행위에 책임을 묻는 합의라고 강조했다. 강조점은 반대지만 가리키는 사실은 같다. 합의가 보상하는 것은 학습이 아니라 불법 취득이다. 합의는 앞으로의 학습을 허락하지 않으며, AI가 내놓은 결과물에 관한 청구도 면제하지 않는다.

보상은 얼마이고, 아직 받을 수 있나

보도에 나온 작품당 약 3천 달러(약 400만 원)는 작가 한 사람이 받는 돈이 아니다. 15억 달러를 작품 수로 나눈 공제 전 추산이다. 원고 측은 9월 법원에 변호사 보수와 소송비용 등을 뺀 첫 배분 예상액은 작품당 약 2,203달러라고 보고했다. 이 돈을 다시 저자와 출판사가 나눈다. 기본 배분은 절반씩이고 계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단독 저자와 단독 출판사가 절반씩 나누면 첫 배분에서 저자 몫은 약 1,100달러다. 번역판은 사정이 더 복잡하다. 한강 작품은 저작권 등록상 저자로 번역자 데버라 스미스가 올라 있다. 그래서 원작자에게 얼마가 돌아갈지는 번역·출판 계약에 달려 있다.

신청 기간은 이미 끝났다. 일반 청구는 2026년 3월 30일 마감됐다. 합의 관리자는 배분에 이견이 없고 지급 정보를 낸 작품부터 11월 15일까지 첫 지급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한다. 10월에 소식을 처음 접한 권리자가 지금 새로 신청할 길은 사실상 없다. 번역원의 2월 안내가 무게를 갖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마감 전에 한국 작가들에게 닿은 공적 안내였다.

21편은 전체가 아니다

다만 그 안내가 닿은 범위는 좁았다. 번역원 관계자는 번역원 지원을 받아 번역서를 낸 적 있는 작가를 중심으로 조사하고 안내했다고 말했다. 중앙일보가 합의 사이트를 직접 찾아본 결과, 번역원 통보 대상 밖에서도 김언수·장하준·한병철과 고 조세희·황순원의 작품, 북한 작가 반디의 『고발』이 목록에 있었다.

숫자도 서로 맞지 않는다. 중앙일보 자체 집계는 15일 '최소 15명·22종'에서 16일 '16명·25종, 별도 비문학 9종'으로 늘었다. 번역원의 '20명·21편'은 연합뉴스가 번역원 설명으로 전한 작가별 편수(김영하 4종, 신경숙 3종, 한강 3종 등)와도 산술적으로 맞지 않는다. 이 차이를 설명한 정정이나 공개 설명은 나오지 않았다. 목록에 오른 한국 작가 작품이 몇 편인지 공식적으로 집계한 곳은 지금 없다.

그렇다고 번역원이 알고도 감췄다고 볼 근거는 약하다. 번역원은 마감 전에 안내했고, 주변에 알려 달라고 썼다. 문제는 안내가 번역원이 지원한 작가라는 기관 업무의 범위에서 멈췄다는 점이다. 그 밖의 작가와 번역자, 출판사에게 누가 알렸는지, 이들이 마감 전에 알았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미국 합의에서 한국 권리자의 구제가 한 기관의 지원 명단에 기대어 이뤄진 셈이다.

같은 소송이 드러낸 다른 길: 사서 잘라 스캔한 책

그런데 이번 주 한국 출판계를 더 크게 움직인 것은 목록이 아니라 같은 소송에서 나온 다른 기록이다. 앤트로픽은 해적판과 별도로 2024년부터 프로젝트 파나마라는 이름으로 디지털 도서를 모았다. 종이책을 대량으로 사들여 책등을 자르고 스캔한 뒤 원본을 폐기하는 방식이었다.

한국 책도 그 대상이었다. 소송에 제출된 앤트로픽의 2024년 11월 27일 내부 회의 자료에는 국내 1위 도서 도매업체 웅진북센과의 계약을 내부에서 승인했다는 보고가 있다. 선적 기록을 취재한 중앙일보에 따르면 웅진북센은 2025년 3월부터 2026년 6월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3349박스, 77~85t의 책을 앤트로픽의 도서 조달 계약사 베터 월드 북스 앞으로 미국에 보냈다. 중앙일보는 이를 17만~21만 권으로 추산했다. 웅진북센은 수출 사실을 인정하면서 당시엔 일반 도서 공급 거래로 이해했고, 스캔·파쇄 문제가 알려진 뒤로는 AI 업체나 의심 업체와 거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어떤 책을 얼마나 보냈는지는 비밀유지 조항을 이유로 공개하지 않았다. 대형 서점 교보문고도 비슷한 주문을 받았다. 해외 업체 약 10곳이 분야와 제목을 정하지 않고 약 10만 종을 한 권씩 사려 한 주문이었다. 교보문고는 최종 납품처와 용도를 확인할 수 없어 거래 논의를 중단했다고 밝혔다.

이 경로에는 보상이 없다. 앨섭 판사는 앞의 6월 판단에서 산 종이책을 파괴하고 디지털본으로 바꾼 것, 그 책으로 학습한 것을 모두 공정이용으로 봤다. 법원은 스캔 도서의 권리자들을 소송 집단으로 인증하지도 않았다. 15억 달러 합의는 해적판에 관한 것이고, 웅진북센을 거쳐 미국으로 간 한국어 책은 애초에 그 대상이 아니다. 같은 주에 두 소식이 나왔다. 한강의 영문판이 보상 목록에 올랐다는 소식과, 한국어 책 약 20만 권 안팎이 책값 말고는 저작권자 몫의 대가 없이 미국으로 건너갔다는 소식이다.

한국에서는 무엇으로 따지나

미국 판단이 한국에서 일어난 일의 적법성을 정하지는 않는다. 한양대 이주연은 논문에서 이 판단을 특정 사실관계와 모델에 관한 미국 1심 판단으로 설명하고, 학습용 이용허락 시장을 고려하지 않은 점은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 저작권법에서 출발점은 복제권이다. 제16조는 저작물을 복제할 권리를 저작자에게 준다. 제20조는 정상적으로 판매된 책을 다시 파는 것 같은 배포만 따로 풀어 준다. 책을 샀다고 그 책을 디지털로 복제해 학습할 권리까지 사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다만 제35조의5의 공정이용에 해당하면 허락 없이도 쓸 수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저작권위원회는 2026년 2월 생성형 AI 학습 공정이용 안내서를 냈다. 안내서는 상업적 학습도 일률적으로 배제하지 않고 네 요소로 따진다고 설명했다. 이용 목적, 저작물의 종류, 이용한 분량과 비중, 시장에 미치는 영향이다. 구체적 사건의 최종 판단은 법원 몫이다.

출판사들의 단체인 한국출판인회의가 15일부터 연명을 받은 호소문은 이 틀 위에서 세 가지를 요구한다. 16일 오전까지 단체 158곳과 개인 321명이 참여한 호소문은 AI가 학습한 작품과 출처, 적법한 이용 근거를 기록해 권리자가 확인할 수 있게 하라고 했다. 이용허락과 정당한 대가도 보장하라고 했다. 거부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고 허락한 것으로 봐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저작권법 전문가인 박정인 덕성여대 AI다이나인포 연구교수는 2023년 AI 학습에 권리자 동의를 받게 하려던 저작권법 개정이 무산돼 지금은 '법적 공백'이라고 말했다.

'법적 공백'을 법이 없다는 뜻으로 읽으면 틀린다. 복제권과 공정이용 조항이 있고 정부 안내서도 있다. 비어 있는 것은 그 조항을 적용할 사실이다. 공정이용인지 따지려면 어떤 책을 얼마나 어떻게 썼는지 알아야 한다. 그런데 웅진북센은 계약을 이유로 제목을 밝히지 않고, 법원에 제출된 앤트로픽 내부 자료에서도 구매 규모는 가려져 있다. 권리자는 자기 책이 들어갔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러니 허락을 거절할 수도, 대가를 요구할 수도 없고, 법원에 판단을 구하기도 어렵다. 출판인회의의 세 요구 가운데 학습 내역 공개가 나머지 두 요구의 전제가 되는 이유다.

정부가 밝힌 방향도 이 요구와 부딪히지 않는다. 정부는 2026년 2월 도서·음악·방송처럼 거래 시장이 있는 저작물은 거래 활성화를 지원하고, 거래 시장이 없는 온라인 공개 저작물에는 옵트아웃과 '선사용·후보상'을 적용하는 제도 개선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옵트아웃은 권리자가 거부를 표시하지 않으면 쓸 수 있게 하는 방식이다. 법 개정을 포함한 계획이어서 아직 현행 규정은 아니다. 그래도 정부는 책을 거부 표시 방식이 아니라 거래로 이용을 허락받는 영역에 넣었다. '거부하지 않은 것을 허락으로 보지 말라'는 출판계 요구는 정부가 도서에 그은 선과 같은 쪽에 서 있다. 그리고 거래가 성립하려면 파는 쪽이 무엇이 쓰이는지 알아야 한다. 지금 없는 것은 그 선을 지킬 장치, 곧 학습 내역을 확인할 제도다.

21편이 말해 주는 것

한국 작가 작품 21편이 목록에 올랐다는 것은 앤트로픽이 해적 사이트에서 내려받은 책 가운데 미국에 등록된 영문판이 불법 취득 보상 대상에 들었다는 뜻이다. 보상은 공제 뒤 작품당 2천 달러 남짓을 권리자들이 계약에 따라 나누는 규모이고, 신청은 3월에 끝났다. 번역원은 마감 전에 일부 작가를 안내했지만, 그 범위는 자기 지원 명단이었다.

더 큰 문제는 이 합의 바깥에 있다. 같은 회사가 한국에서 사들인 약 20만 권 안팎의 한국어 책은 이 합의와 무관하다. 미국 법원은 산 책을 스캔해 학습하는 길을 공정이용으로 열어 두었다. 한국에서는 그 이용을 따질 조항은 있지만, 따지는 데 필요한 사실, 곧 어떤 책이 쓰였는지를 권리자가 알 수 없다. 출판계 요구가 향하는 곳은 21편의 보상금이 아니라 그 빈자리다. 그리고 그 요구는 현행 저작권법의 원칙과도, 정부가 밝힌 도서 정책 방향과도 어긋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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